블로그를 옮겼습니다. 여기 있는 글들은 보관할 것이지만 앞으론 coldcavern.tistory.com으로 와주세요. 지금까지 들러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두 눈으로 왜 한 곳을 쳐다보면서도 서로 바라볼 수 없을까 오래 비워두어서 어둠이 무단점거한 집에 들어 텅 빈 운동장 같은 마음에 퍼지는 밤의 물무늬를 들여다본다 판화처럼 멈춰 선 채 누군가 이 풍경을 색칠해주길 기다린다 파도가 모래사장에 쓰인 전언을 까마득한 풍화 속으로 데려가듯 어떤 피할 수 없는 사건이 나를 지워주길 바라고 있다 블랙홀처럼 깊이깊이 슬픔의 빛을 빨아드리며 캄캄해지고 있다 크나큰 비관과 크나큰 낙관은 암수 한 그루이듯이 블랙홀에 삼켜지는 별이 가장 눈부신 광선 다발을 내뿜듯이 말해지지 않는 슬픔들이 문득 조각칼 같이 날카롭게 일어서는 순간 나는 몰락을 예언 받고 불가지론자의 낯빛으로 신전을 나오는 왕처럼 예감한다 맞잡았던 손과 손 사이의 인력이나 인연 같은 것들을 끝내 알 수 없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빈 동전지갑 같이 벌어진 상처 안에 남은 한 닢 은화를 단단하게 추슬러 목발처럼 짚고 장전된 탄환 같이 옹송크린 세속으로, 외계로, 시간의 트랙 밖으로, 너에게로,

하나였다가
둘이었다가
세계가 되는

나의 극지로, 하릴없이 갈 수밖에 없는 운명이 있다는 걸 예언을 벗어나려는 몸부림이 결국 예언을 완성했음을 깨달은 왕의 비극으로 나는 다시 알게 된다 왜 멸망을 향해 걸어가는 왕은 아름다운 신화가 되는가 메아리의 지표생물이 자라는 너의 정원이 닫혀 있다면 나는 나에게로 돌아가는 길을 잃을 것이지만 별똥별들을 주주로 삼고 묵언으로 편지를 적는 회사를 세워야겠다 대책 없는 낙관의 공수표와 나의 몰락이 기록된 어음을 발행하며 밭은 기침 앓는 가난한 하루들이 노동하는 공장의 물레를 돌려야겠다 너의 한마디로 인해 나의 지구는 자전을 멈췄다가 어제와 내일의 계절을 불러들이기도 했듯이 그 맹신이 힘만으로 시간이라는 이름표를 단 집배원도 수취인 부재의 죽은 편지를 피 묻은 한 장 엽서를 객지에서 산화한 계절들의 전사 통지서를 전파보다 가벼운 영혼으로 지치지도 않고 물어 나를 것이다

세계였다가
둘이었다가
하나가 되는

첫 편지가 달빛의 창백한 안색으로 불운한 우편함을 점치고 있다 유능한 탐정이 단서를 찾는 섬세한 손길로 나는 인간에게라고 썼다가 지운다 다시 너 당신 그래 고아에게라고 적어본다 이때 흐릿하게 남은 별들이 모스부호처럼 깜빡이며 주소를 타전한다 매일 밤 모아 불태우는 죽은 편지들의 연기가 우주로 날아간다 집과 북극성 그리고 당신은 이음동의어 나는 마침내 내가 아는 단 하나의 항구를 그려 넣는다

북극성에서 편지를 받아 볼 독자여
두 개의 눈덩이는 서로 맞닿아야 비로소 한 사람이 된다
그 순백의 사람으로서 우린 겨울밤 서로의 체온을 앓으며
함께 녹아가자 은하수의 별처럼 따로 또 같이 흐를

편지를 밀봉하는 순간 세계는 둘로 쪼개진다
부치지 않았으면 어쩌면 완벽했을지 모를 하나의
괄호


(이현호, 북극성으로 부치는 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