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를 옮겼습니다. 여기 있는 글들은 보관할 것이지만 앞으론 coldcavern.tistory.com으로 와주세요. 지금까지 들러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너를 경經처럼 읽던 밤이었지


낯선 문법에 길 잃고 자주 행간에 발이 빠져

시든 줄기 같은 문맥을 잡고, 점자인 양 널 더듬거렸지


창틈으로 난입하는 빗소리에 글자들 번져

점점 눅눅해지는 어둠 헤치며, 너를 읽어 내려갔지


폐허가 된 역사驛舍에서 너의 그림자,

검은 장미 숲으로 떠나는 열차 기다리며

산문적이었던 삶의 비문非文들을 생각했지


레코드판같이 돌아가는 밤하늘 아래

안개는 가로등 불빛을 한 뼘 비켜 흐르고

역사歷史가 되감겨와, 가물거리는 한 구절 경을

늘어진 테이프처럼 읊조렸지


마지막 페이지를 새긴 열차는 끝내 오지 않고,


어둠의 깊이만큼 경은 또 한 번 두꺼워지는



(이현호, 국제여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