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경經처럼 읽던 밤이었지
낯선 문법에 길 잃고 자주 행간에 발이 빠져
시든 줄기 같은 문맥을 잡고, 점자인 양 널 더듬거렸지
창틈으로 난입하는 빗소리에 글자들 번져
점점 눅눅해지는 어둠 헤치며, 너를 읽어 내려갔지
폐허가 된 역사驛舍에서 너의 그림자,
검은 장미 숲으로 떠나는 열차 기다리며
산문적이었던 삶의 비문非文들을 생각했지
레코드판같이 돌아가는 밤하늘 아래
안개는 가로등 불빛을 한 뼘 비켜 흐르고
역사歷史가 되감겨와, 가물거리는 한 구절 경을
늘어진 테이프처럼 읊조렸지
마지막 페이지를 새긴 열차는 끝내 오지 않고,
어둠의 깊이만큼 경은 또 한 번 두꺼워지는
(이현호, 국제여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