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em

허연, 빛이 나를 지나가다

괴물도, 물개도 아닌 개물 2018. 6. 10. 09:51

초월한다는 게 도대체 모르핀 같은 건가. 손목이 부러지고 깁스한 지 한 달째, 우울한 팬터마임으론 아무도 웃기지 못 한다는 걸 알았다. 이미 어두울 만한 데는 몽땅 어둡고 뼈만 하얗게 빛나는 밤하늘이 필름 속에 그득하다. 고래고래 욕하고 헤어진 사랑만 하얗게 남는구나. "2주만 더" 라는 의사의 선고를 받고 피식 웃었다. 혹시 썩고 있는지도 몰라. 빌어먹을, 흙 속에 손목을 파묻고 싹이 나기를 기다리지.


남은 한 손에 가방까지 들었는데 하필 비가 올 건 또 뭔가. 택시의 얼굴이 하나같이 사납다. 글씨야 안 쓰면 그만인데, 손 다치고 나니까 웬 놈의 박수 칠 일이 이렇게 많은지. 용서하자. 빛은 어딘가에 도달하기 위해 나를 지나쳤을 뿐, 어차피 내 손목이나 내 사랑은 안중에도 없었다.



(허연, 빛이 나를 지나가다)